혹시 수면 마취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가?
혈관을 타고 마취약이 들어간 이후, 누군가에게 숫자를 거꾸로 세어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해서 분명 몇까지 세고 있었는데, 어느새 간호사가 깨우는 목소리가 들리고, 눈을 떠보니 전부 다 끝났다고.
그렇게 기억도 못 하는 사이, 체감상 한순간조차 아닌 찰나 만에 나를 뒤바꾸는 모든 변화가 끝마쳐진 상황.
지금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여긴…어디야?’
눈을 떠보니 웬 이상한 뒷골목에 서 있었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하고 있었던 내 자취방과는 전혀 다른 생경한 공간.
야외 특유의 차갑고 건조한 공기가 오싹하게 코끝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얼음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리길 잠깐.
이윽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미 충분히 이상한 상황이지만, 그보다도 더욱, 말로 형용할 수 없는데도 본능으로 직감하는 그런 종류의 이질감.
무심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골목 구석 먼지로 흐릿한 유리창 앞에 섰다.
“……..”
오늘따라 유난히 자그마하게 보이는 오른손을 들어서, 창문의 먼지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닦아낸 유리창 너머로 내비치는 모습은 정말이지 낯선 얼굴이었다. 분명 제 것이어야 할 텐데도 몹시나 생경하다. 인상이나 이목구비를 넘어서 연령, 인종, 심지어 성별마저도 원래와 전혀 반대인 모습이 그곳에 서있었으니까.
‘이게 뭔, 대체 뭐야…’
황망하게 스스로를 바라보는 하늘빛 눈동자의 미소녀.
어깨를 타고 길게 흘러내리는 은백발과, 가녀린 몸의 굴곡.
마치 공들여 묘사한 일러스트에서 볼 법한 미모의 여자아이가 유리창 너머의 스스로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소녀는 이쪽이 시선과 고개를 돌릴 때마다 똑같이 따라서 고개를 움직였다.
그 모습에서 이내 경악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이 애가 나라고?’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치, 침착하자. 일단 이게 무슨 일인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혼잣말의 목소리조차 너무도 낯설어서 다시 한번 흠칫.
어깨를 부르르 떨고 정신 차리잔 의미에서 양 뺨을 한 번 때렸다.
그리고 최대한 상황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더니, 뭔가 묘하게 눈에 익숙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잠깐만, 자세히 보니 이건….?’
소녀의 외모는 아까 전 실행했던 게임, [신더 나이츠]의 성녀 태생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똑 닮아 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새가 그랬다. 검은 수도복. 목에 건 별빛 문양 로자리오. 막 교회 시대에서 튀어나온 수녀의 모습이라고 할 법했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면, 하늘 높이 솟아오른 마천루가 보였다.
하지만 현대의 도심과는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화려한 네온사인. 수시로 하늘을 가로지르는 승용기. 시야를 휩쓰는 홀로그램 광고판으로 가득 찬 근미래의 메트로폴리스.
그 모습이 어쩐지 또 익숙해보여서 다시금 깨달았다.
‘여긴…. 오메가 디트로이트 아니야?’
네오프런트 사이버시티의 배경. 기술과 향락, 그리고 폭력으로 가득 찬 기회의 도시.
그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멍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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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아니아니아니, 잠깐만-‘
상황이 너무 뒤죽박죽이어서 혼란스럽다.
분명 ‘사이버 시티’와 ‘신더 나이츠’는 창작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세상이다.
그런 게임 속 세계에 왔다는 사실 자체도 믿기지 않는데, 심지어 거울 속에는 원래의 내 모습도 아닌 낯선 여자아이만 비치고 있다니.
정신줄을 놓아버릴 지경이다. 혹시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생생하다.
차가운 공기, 뒷골목의 악취,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자국 하나하나까지도.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드는 직감이,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었다.
몹시 당황하던 그 순간, 난데없이 울려퍼진 소음.
덜컹!
“….!”
나는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혼자뿐인 뒷골목엔 다시금 정적이 찾아들었다.
‘아마 바람이 불었던 거겠지.’
허나 이미 덜컥 놀란 마음으론, 아까 전과 똑같은 풍경조차 뭔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뒤늦게 이 장소가 그리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랐다.
‘만약 여기가 진짜 [오메가 디트로이트]라면…..’
그 도시의 범죄율은… 설정상 현실의 남미나 아프리카 우범지대의 수십 배를 훌쩍 넘긴다.
저 마천루 꼭대기의 부촌이라면 몰라도, 이런 하층 뒷골목에선 납치, 강도, 심지어 살인까지 일어나도 모를 지경이었다.
대놓고 사람이 사라져도 경찰은 찾는 시늉조차 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되돌아보면, 지금 스스로의 상태는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옷차림부터가 이 미래도시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 때문에 종교가 사멸된 시대에 이런 수녀복이라니. 코스프레를 하고 대중교통을 타는 것만큼이나 이목을 끌게 될 것이다. 그만큼 범죄의 타겟이 될 확률도 높아지겠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외모가…
‘너무 눈에 띄잖아.’
쓸데없이 예쁘게 커스터마이징된 성녀의 얼굴은, 실제로 보았을 때 스스로도 잠깐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
이 시대에서조차 연예인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 수준.
나쁘게 말해서 으슥한 곳에서 납치당하기 딱 좋은 관상이다.
이대로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가는 고작 한 블록 넘어가기도 전에 무언가 사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럼, 이후의 일은 상상하지도 못할 최악의 결과뿐이겠지.
‘으으… 설마 내가 그런 것을 걱정하게 될줄이야….’
원래 남자였던 입장에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수백 시간을 쏟아넣어서 종결급 의체로 무장시킨 내 플레이어 캐릭터는 어디로 가고, 웬 연약한 소녀로 변하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쪽이었더라면 이런 걱정 따윈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이미 벌어질 것은 벌어진 상황. 걱정보다는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근처에 놓인 쓰레기 컨테이너 하나를 발견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떠올린 아이디어 하나.
“…..”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게 최선인가.
꼭 해야만 하는가.
그러한 내적 갈등에 한참을 시달렸지만, 그래, 안전이 제일이니까.
“흐읍-!”
숨을 꾹 참고 다이빙했다.
악취가 흘러나오는 쓰레기봉투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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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눌러쓴 모자 아래,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행인의 그림자가 보였다.
조금씩 좁혀지는 거리에 살짝 긴장했던 것도 잠시.
“으응? 크윽-”
저쪽에서 먼저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찌푸린 채 멀찍이 떨어져서 지나쳐간다.
“……”
아마 내 몸에서 피어오르는 냄새 때문일 것이다.
아까 전, 쓰레기통을 헤엄치듯이 뒤져서 찾아낸 헤진 검정색 비닐 우의 한 벌.
그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오물 얼룩을 덕지덕지 묻힌 꼬질함은 마치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노숙자였다.
덕분에 스스로도 견디기 힘든 역한 악취가 온몸에서 묻어나왔지만, 험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게 훨씬 나았다.
봐라, 부랑자처럼 보이니 아무도 일말의 관심조차 안 주잖아.
‘그나저나, 진짜 사이버시티네.’
뒷골목에서 잠깐 올려다봤던 도심의 풍경으로 먼저 알아보긴 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거리로 나오자, 차원이 다른 체감이 되었다.
지나다니는 차량의 미래적인 디자인. 행인들의 전위적인 패션.
실제 팔다리 대신 흔히 보이는 금속 의체에다가, 구석구석 개성 넘치는 임플란트까지.
화려한 간판으로 가득 찬, 현대의 빌딩 숲보다 훨씬 밀도 높고 수직적인 도심 광경은 그야말로 완전히 별천지였다.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처럼 주변을 구경하길 한참, 그러다가 문득 맥이 탁 풀렸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일단 당장의 상황을 모면할 만한 아이디어까진 떠올랐지만, 아무래도 앞일이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방구석에서 게임하다가, 한 순간에 낯선 세상의 미아로 떨어져 버렸으니까.
내가 뭘 잘못했다고 갑자기 이런 고생을 시키는 걸까.
조금씩 기분이 울적해져갔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눈시울과 콧등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킁-”
하지만 이내 고개를 휘저어 잡념을 털어냈다.
‘몸이 이렇게 변하니, 성격까지 감성적으로 물들어버린 걸까.’
이렇게 사소한 일로 우울해하는 건 원래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언제는 인생이 생각대로 풀린 적 있었나. 일단 부딪혀 보는 거지.
누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원래 세상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응, 분명 할 수 있어. 해낼 거야.’
그렇게 되뇌이며, 억지로 기운을 내보았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그렇게 한참 걸어간 뒤였다.
‘찾았다.’
드디어 눈앞에 보이는 간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에서 보았던 기억이 없었더라면 결코 찾아오지 못했을 복잡한 아파트의 한구석.
< K 해결사 사무소 >
묘하게 엉성한 LED 조명 간판이 붙은 현관문 앞에 서서, 나는 조용히 마음을 다잡고 차임벨을 울렸다.
그러자 대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어렴풋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릉- 따르릉-
“………”
이후로도 한참 동안 기다린 뒤에야 덜컹 열리는 현관문.
그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자, 작달막한 방 한 칸의 정경이 보였다.
테이블과 양옆에 놓인 의자로 응접실 구색만 맞춰둔 수준.
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은 서른 중후반쯤 되었을 법한 여성이었다.
한창때의 젊고 싱그러운 분위기는 사그라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미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외모.
제법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가 가볍게 이쪽을 훑다가 흠칫 찌푸려졌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코를 틀어막고 구겨진 표정에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걸 쫓아낼까 하는 고민이 서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문전박대당할까 조급해진 마음에 나는 서둘러 지저분한 우비를 벗어내며 이야기했다.
“자, 잠시만요. 저 거지 아니에요. 의뢰하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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