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고 누군가 말했던가.
그 말처럼,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긴 했어도 내 생활은 이전과 다름없이 흘러갔다.
불의의 사고는 사고였고 현실은 현실이다. 내겐 여전히 해야 할 일과가 남아 있었다.
당장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고, 마실 것을 사고, 관리비를 지불할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여지없이 아르바이트에 출근한 참이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응, 이브 안녕! 어서 와!”
언제나와 같이 화사하게 웃으면서 반겨주는 사장님.
만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 삭막한 도시에서 어떻게 저리 밝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좋은 분이었다.
알바생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시는 건 물론이고, 혹여나 일을 실수해도 타박하지 않고 하나하나 상냥하게 가르쳐주셨다. 그 밖에도 정말로 많이 신경써주셨다. 한 번은 퇴근할 때 집에 저녁거리가 없다고 하자 일부러 피자를 새로 한 판 만들어 챙겨주시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정말 좋으신 분이야.’
그녀 덕분에 이 도시에서의 적응이 훨씬 수월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출근하는 일 자체가 일종의 힐링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솔직히 오늘도 그랬다. 최근에 겪은 사고가 워낙 큰일이라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또 사장님 성품이 원채 너그러우셔서 사정을 이야기하면 며칠 휴가를 주셨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눈치가 보였다.
좋은 분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고, 기껏 일하게 된 지 얼마 안 되어 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몸이 다친 것도 아니고 말이지.’
무엇보다도,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휘말린 사건 자체가 꺼림찍했으니까. 한낮에 벌어진 보안 기업과 갱단간의 총격전에는 무언가 복잡한 내막이 있을 가능성도 무시 못했다. 원작 게임을 하다보면 이런 이벤트에서도 파생 퀘스트가 나오곤 하니까. 거기서부터 엮여드는 속사정도 많았다.
만약 우연이라도 관련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또 일이 복잡해질수도 있었다.
그런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굳이 남에게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때문에 오늘도 평소처럼 출근한 피자 가게 아르바이트.
나는 카운터 앞에 서서 통창 유리 바깥의 거리를 잠깐 멍하게 바라보았다.
“…….”
삼삼오오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얼굴은, 불과 두세 블록 떨어진 곳에서 수십 명이 총격전으로 죽어 나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했다.
만약 한국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근처에서 인적이 싹 사라졌을 것이다. 몇 달간 유령 거리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태연한 사람들과 너무도 일상적인 분위기뿐이다.
이 괴리감이 내가 다른 세상에 와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일깨워주고 있었다.
“후우….”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역시 여긴 내가 살아갈 곳이 아니야.’
이 도시에서 지내는 하루하루는, 그저 즐기기만 하면 끝인 게임과는 전혀 달랐다.
여기선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가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었다. 그건 나 자신의 목숨이라고 다를 바 없다. 고작 며칠 전의 사건로 확실하게 실감해버린 위기감이었다. 때문에 더더욱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던 순간, 주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 268번, 슈프림 두 판이랑 치즈 한 판 나왔어! 배달이야!”
“네! 바로 출발시킬게요!”
답답한 마음과는 별개로,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나는 주방에서 건네받은 피자 박스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근처에 거치된 배달 드론 중 하나의 뚜껑을 열고 주문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드론이 스스로 날아올라 주소지까지 배달을 시작했다.
부우웅-
벌떼같은 소음과 함께 하늘 위로 멀어지는 모습을 잠깐 바라보다가 다시 가게로 들어왔다.
보다시피 이제 아르바이트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애초에 업무 자체가 어렵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음식은 사장님이 직접 만드셨다. 정말 바쁠 때는 주방 일을 돕기도 했지만, 내 주된 역할은 카운터 접객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손님을 직접 대면할 일은 적었다. 장사가 잘 안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배달 주문이고 그마저도 무인 드론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쪽의 업무는 대부분 주방에서 나온 피자를 드론에 넣고 배송 번호를 입력하면 끝. 처음에는 갑자기 밀려드는 주문에 조금 헤맸지만, 익숙해지니 거의 버튼만 딸깍딸깍 누르는 단순 작업이 되었다.
‘이런 꿀알바를 소개해준 카일라와, 흔쾌히 채용해준 사장님께 감사의 기도를….’
정말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다행이다. 다른 세상에 떨어진 후 생긴 사건들 사이에서, 이것만큼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여기서의 일은 대부분 어렵지 않은 근무였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좀 골치 아픈 트러블이 생기기도 했다.
지금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통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인기척에 느낌이 좋지 않았는데, 역시나였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 아, 또 ‘그 남자’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오세요.”
“어, 우리 이쁜이 오늘도 있네?”
껄렁한 말투, 몸에 딱 붙는 티셔츠와 헤진 청바지. 싸구려 보형 임플란트로 부자연스럽게 부풀린 근육질 팔뚝 아래에는 과시적인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형형색색이었다. 오메가 디트로이드 뒷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길거리 양아치였다.
남자는 카운터 앞에 턱 기대서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기름기 도는 그 시선이 내 몸을 노골적으로 더듬는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예전의 나였다면 ‘웬 미친놈이지?’ 하고 넘겼겠지만, 지금은 이쪽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알게 되었다. 따라서 그 시선에 담긴 음습한 의미 또한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제발, 오늘은 그냥 적당히 하고 갔으면.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사무적인 목소리를 냈다. 메뉴판을 가리키며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는 내 노력을 비웃듯 말을 이었다.
“주문? 해야지. 근데 있잖아, 우리 이브는 오늘따라 더 이뻐 보이네? 남자친구 없지? 이따 근무 끝나고 오빠랑 뭐……”
“페퍼로니 피자 라지 사이즈 포장이요.”
나는 그의 말을 곧바로 끊었다. 유니폼 명찰을 보고 멋대로 이름을 부르는 무례함도, 유치하고 느글거리는 말투도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외견이 바뀌었다고 해도 내 정체성은 이전 세상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시커먼 남정네의 추파는 소름 끼칠 뿐이었다. 특히 저런 양아치 같은 부류는 친구로도 두고 싶지 않을 만큼 질색하는, 아니 혐오하는 타입이었다.
내 얼굴에 드러난 노골적인 불쾌감을 그도 봤을 테지만, 그저 히죽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아이고, 성격도 화끈하시네. 근데 그런 점도 매력이야.”
남자는 주문을 하고 나서도 바로 가지 않았다. 카운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피자 박스를 접을 때도, 음료수를 꺼낼 때도 그의 시선은 끈적하게 따라붙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불쾌함에 숨이 막혔다. 등 뒤에 달라붙는 시선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이브는 손도 예쁘네. 그런 손으로 계산해주는 피자는 얼마나 맛있을까?”
내가 직접 조리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나는 대답 대신 피자가 주방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 포장 나왔습니다. 28 크레딧 달러입니다.”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자 박스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남자가 돈을 내는 대신 이쪽의 손목을 덥석 잡으려 했다.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확 뺐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아, 왜 이렇게 튕겨? 오빠가 그렇게 싫어?”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계산 부탁드립니다.”
그는 잠시 내 굳은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으며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던지듯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알았어, 알았어. 오늘은 이만 가줄게. 근데 우리 예쁜이, 내일 또 올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느끼한 윙크를 날리고 그는 피자 박스를 들고 가게를 나섰다.
딸랑-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참았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어휴….”
속에 든 게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겉모습에 발정나서 껄떡거리는 꼴이란.
두려움이나 무력감보다는… 그래, 빡친다고 할까.
‘고객만 아니었어도.’
쯧- 하고 혀를 차던 그때 주방에서 사장님이 나왔다.
“이브, 무슨 일 있었어?”
그녀는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마 내 표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까 그 손님, 좀 이상했지? 혹시 또 와서 이상한 소리 하거나 귀찮게 하면 바로 나 불러. 내가 아주 그냥 혼쭐을 내줄 테니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사장님의 모습이 든든하면서도, 어딘가 귀엽게 느껴졌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별일 아니었어요.”
나는 애써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사장님은 본인 말처럼 손쉽게 진상을 쫓아줄 만큼 무서운 인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순한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귀염상이랄까. 저런 양아치가 그녀를 봤다면 분명 타겟을 바꿔 더 징그러운 추파를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힘든 것도 아니었고.’
내가 겉모습처럼 진짜 가녀린 여자아이였다면, 조금 전의 상황에서 겁을 먹고 곧장 사장님에게 의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도 않으니까. 아까 진상의 행동은 그저 역겹고 징그러울 뿐, 별로 괴롭진 않았다.
단지 조금 짜증났을 뿐이다.
“정말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네, 정말 괜찮아요! 피곤해서 그런가 봐요.”
나는 일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사장님은 몇 번 더 내 상태를 살폈지만, 내가 완강히 괜찮다고 하자 더는 묻지 않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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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찾아온 퇴근시간.
낮의 북적이던 거리는 어느새 한산해져 있었고, 해가 기울어져 네온 간판의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귀갓길을 걷던 중, 조금씩 긴장이 풀리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그래도 이제 다음날부턴 주말이다. 숙소로 돌아가서 쉴 생각을 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바로 그때였다. 익숙한, 그리고 불쾌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 것은.
“어이쿠, 이쁜이. 여기서 다시 보네? 이거 완전 운명인가 봐. 안 그래?”
…최악이었다. 하필이면 조금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선 참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낮에 봤던 그 양아치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잘 만났다. 오빠 퇴근하는 길인데, 우리 이쁜이도 퇴근? 그럼 같이 놀러 갈래?”
“필요 없어요.”
나는 최대한 차갑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여기는 가게 바깥이니까. 이제 더 이상 저걸 손님으로 대할 필요도 없었다.
냉담한 태도를 마주한 남자의 표정이 순간 와락 굳어졌다. 히죽거리던 미소가 사라지고, 불쾌함과 분노가 뒤섞인 험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 씨발, 존나 비싸게 구네.”
낮과는 전혀 다른, 노골적인 적의가 담긴 목소리였다.
“튕기는 것도 작작 해야지. 네년이 뭐, 저기 마천루 꼭대기에 사는 공주님이라도 되는 줄 알아?”
남자가 침을 찍 뱉으며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싸구려 향수와 알코올 냄새가 역하게 풍겨왔다.
“여기가 어딘 줄은 알고 까불어? 여긴 CCTV도 없어, 썅년아.”
그의 눈빛이 번뜩였다.
“네가 소리를 지르든 뭘 하든, 아무도 안 온다고. 뭔 짓거리를 해도 말려줄 사람 따윈 없다 이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위협적으로 팔을 뻗어 내 앞을 막아서듯 다가왔다.
이제 거리는 불과 한두 걸음.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조용하게 부탁했다.
“죽이진 말아주세요.”
“뭐?”
그 순간 그림자 속에서 뻗어나온 손길이, 양아치의 어깨를 덥썩 붙잡아 으스러트렸다.
으직-!